페트릿 제닝스-웰치: 훌륭한 사람, 훌륭한 삶
(4/09)
대니얼
패트릭 웰치
패트리샤
제닝스 웰치. 정말 대단한
여인이지 않습니까? 소저너
트루스의 유명한 연설 구절을 처음 암기 할 때,
저의 어머니가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저기 있는 저 남자는, 여자는
마차에 올라 타는데 도움이 필요하며, 웅덩이를
지날 때는 안아서 건너가게 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저를 마차에
올라타거나 웅덩이를 건너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가장 좋은 자리를
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전 여자가 아닐까요? 저를 보세요.
제 팔을 보세요.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며, 그리고
수확하여 헛간에 옮겨 날랐죠. 그리고
어떤 남자도 제 위에 존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제가 여자가 아닐까요? 저는
남자 만큼 먹고-먹을 게
있다면- 남자 만큼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채찍질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전
여자가 아닐까요? 전
열세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거의 모두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셔 애통해 할때도 예수님만이
저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럼
전 여자가 아닐까요?”
존경과 존엄 그리고 노력과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것 그 모든것들을 저는 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 오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게 될 저희 어머니는 아주 복잡하고, 강인하고 의지가 굳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존경심, 강인함, 동정심 등을 함께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제가 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지요. 어머니는 저에게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아무도 우리들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라는 것이었지요. 막힌 화장실 고치는 일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책 읽는 것을 가르치는 일과 동일하게 중요한 일이며, 노력 없는 삶은 가치 없는 삶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을 함께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 없이 자신 만을 위한 노력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과 동시에 무가치 한 것이란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 어머니와 이런 특별한 관계 즉, 어머니이자 친구이며 그것도 절친한 친구이며 스승인 그런 어머니를 둔 것을 아주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머니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아주 행복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산 안토니오에서 오스틴까지 수영 경기나, 미사, 야구 경기, 생일 파티 등 기타 행사에 갈 수 있으면 모두 참석하고, 머무를 수 있는 한 오래 머물렀습니다. 직계 가족이 아니더라도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가족의 일부로 생각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어머니일지 몰라도 어머니는 어떤 면에서는 주 재산의 일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주 높은 지성과, 지식에 대한 갈구 그리고 교육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독일에서 온 제 친구 보커는 이러한 어머니의 능력을 실제 체험할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합니다. 보커가 말하길, “최고의 어머니셨지요. 마치 저를 어머니의 자식인양 대해 주셨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두를 선생님을 원하셨죠. 어머니이자 학교 창시자이자 스승으로 말이죠.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게 아주 슬프긴 하지만 살아 있는 어떤 사람 보다 더 우리의 기억 속에서 가까이 살아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수 많은 꽃들을 그녀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 꽃들은 어머니가 심은 씨앗, 어미니가 키운 꽃들, 사람들의 꿈을 일깨워주고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며 성공의 열매를 냊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북돋아 준 어머니의 노력에 대한 치하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이 어려운 시간을 함께 해 준저의 동반자인 제 아내 줄리아를 빼 놓을 수 가 없군요. 지난 수 년동안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는 동안 어머니를 간호할 수 있도록 줄곧 제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어머니를 목욕시키는 것 부터 시작해서 결혼 날짜 변경까지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까지 줄리아의 저에 대한 사랑과 이해, 어머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 모두의 꿈-중국12궁의 세마리 용 또는 PD&J 팀을 위한 사랑은 줄리아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말했듯이 그러한 사랑은 서로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절대 필수적인 것입니다.
가끔 무리한 것을 요구 할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이 우리를 사랑해서임을 알고 또 그러한 어머니의 요구가
옳다는 것을 압니다. 지난 번에 함께 부른 노래의 한 구절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 데요. – 계곡아래에서 태어났다네/햇볕도 들지 않는 곳/그러나 나는 위로 올라갔다네/저 산을 내것으로 만들리!
어머니는, 물론, 여러분이 알고 계시든 모르고 계시든, 모두에게 이러한 의지를 요구하셨죠. 아마 그것은 선생님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엄마로서의 자격도 마찬가지겠죠. 어머니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엄격하셨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저 사람은 할 수 없어라고 못 박은 사람들에게 더욱 더 엄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팻 웰치의 미스테리는 언제나 달을 향해 쏴라라는 것인데(맞출 때도 있으니까요) 그것은 아주 실용적이기도 하답니다. 왜냐하면 자괴감에 빠져 있은 것은 부도덕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지난 주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무수히 해 주었습니다. 어떤 학부모는 줄리아와 저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학교에 아들을 데려다 줄 때 선생님에게 이런말을 했었어요. ‘아이를 데리러 올 수가 없겠어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그냥 학교에 데려다 주세요. 그 다음은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저 산을 내것으로 만들리! 다시 말하지만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
제 사촌 중 한명은 팻 이모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제게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낙천적인 분이시며 하리라는 의지만 있으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믿는 분이셨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시도해 보려고도 하지 않은 일들을 어머니로 인하여 성취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는 어머니의 의지력에 대한 명성은 어머니의 작고로 인해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릅니다. 전 부고란에 실수로 날짜를 잘못 썼습니다. 그리고는 간단히 ‘오타’라고 해명한 다음 정정 날짜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사촌은 즉시 제게 이 모든것이 오타였으면 좋겠다고 제게 연락을 했습니다. “팻시가 벌떡 일어나 이 모든것이 오타고 자신은 멀쩡히 살아 있다고 얘기했으면 좋겠어”라고.
돌아가시기 몇주전 어머니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어 다오. 그럼 5년이나 10년후에 내가 갖고 있는 질병을 고칠 수 있을때 나를 깨우면 되지 않겠니.” 또, 친구분이 가게에 가는데 혹시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어보자, “새로운 폐를 사오면 몰라 다른건 필요없어.”라며 웃으셨습니다. 푸른 눈을 반짝이면서 말씀하셔서 우린 모두 그냥 농담하시는 줄 알았지요. 농담이지요..그렇지요? 누가 알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시, 어머니에게 지어 준 시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마지막 몇 주 함께 읆조리곤 했었지요.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요.
팻지
오늘 우리 딸 하얀 옷을 입었네
하느님의 영혼을 상징하는 하얀 옷
하느님과 함께
예수님이 간 길을 걸어기가 위하여
순수한 생각과 힘찬 발걸음
즐거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꿈
인생의 험한 길을 행진하고 시련을 이기기 위하여
너에게 힘을 주기 위한 것들
신의 진정한 용사
너의 싸움은 살아야 할 인생
이땅에서 시련을 모두 이기고 난 뒤에는
하느님의 곁으로 갈 수 있으리
할아버지는
다른 시도 쓰셨는데 그 시는 할아버지 자신과
할아버지의 어머니를 생각한 것입니다. 최근에, 어머니와
저를 생각하며 자주 그 시를 떠올리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외출했을 때,
어머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Y와
새로지은 데븐포트, 그리고
묘지까지도. 아마 어머니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저희에게 암시하신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믿음
그녀가
십자가를 쥐고 꿇어 앉으면 어떤이는 빈정댈지도
모릅니다
손가락엔
십자가가 쥐어 있지만
삶의
시련에 지쳐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었슴을 알지요
삶에는
지쳐있고 죽음은 두렵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십자가가 그녀의 희망입니다
마지막 숨
저 넘어에는 또 다른 삶이 있을 거라는 희망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세상
그녀가
십자가를 쥐고 꿇어 앉으면 어떤이는 빈정댈지도
모릅니다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신의 품에
평안을 찾습니다
신이 비록
지친 삶에 대해 모를지라도
세리단 신부님과 여기계신 분들에게 제가 너무 오래 얘기하고 있다면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계속 계속 얘기하고 싶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저희가 함께 부른 또 다른,장의사여 부디 천천히 운전하여 주오 라는노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되었으면 가야되는 거지요. 우리가 시간이나 세월을 맘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죄송합니다. 파티에서 언제나 끝까지 남아 있던 이 훌륭한 여인은 이제 편안히 쉴때입니다. 운명과 병마와 세월에 맞서 끝까지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들으셨는지 못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또 못 들으셨다고 해도 괜찮지만, 전 어머니 귀에 대고 이제는 더 이상 힘들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제는 편안히 쉬셔도 된다고 속삭였습니다. 마지막 몇주 동안 이틀에 걸쳐 제가 그렇게 말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1월 20일은 어머니 담당의사와 마지막 예약일이었는데요. 그 날은 어머니가 이제 정말 떠나시려는구나 하고 느끼게 해 준 날이었습니다. 그 날 밤, 어머니 방에서 줄리아와 제가 잠을 자고 어머니 말 벗도 해 드리고 있었는데 제가 줄리아에게 “어머니가 식사를 안 드셔” 또는 “어머니가 책을 안 읽으셔” 등과 같이 걱정의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줄리아는, “팻 웰치에게 그건 정말 안 좋은 징조인데”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1월 20일은 대통령 취임식이기도 하더군요. 그 날은 어머니가 8년을 기다려 온 날인데요. 2004년에 어머니가 우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냐고 여쭙자, 어머니는, “부시가 대통령직을 떠나는 걸 못 보고 죽을 지도 모르잖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1월 20일은 어머니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특이한 날은 어제 생각난 건데요. 우리는 그 날 CVS에 갔었습니다. 어머니 약 처방을 받으러 아주 자주 가던 곳시지요. 그 날은 울면서 주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어머니 장애인용 카드를 꺼내 차에 붙이고 장애인 자리에 주차를 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위반 행위를, 법이든 어머니든 아무도 제게 뭐라고 못할 것임을 알자 웃음이 나더군요. 그런데 백미러로 장애인 카드를 보자 만료일이 눈에 띄었습니다. 2009년 2월 24일 –바로 그 날 우리는 브리햄으로 어머니를 급송하던 날이었지요. 그리고 그날이 저의 작은 차에 어머니를 모시게 된 마지막 날이기도 하구요. 놀라워서 잠시 앉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제 불쌍한 우리 어머니 편하게 쉴 때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해요 어머니. 언제나 저희 가슴에 살아계실 거예요. “여행길이 당신을 맞이하기를, 항상 등 뒤에서 바람이 불기를, 당신의 얼굴에 따뜻한 햇살이 비추기를,당신의 들판에 촉촉히 비가 내리기를....그리고 다시 만날때까지, 신이 당신의 손을 꼭 잡고 계시기를.” 사랑해요, 어머니. 안녕..
© ダニエル パトリック ウェルチ 複製許可します。
Translated by Ky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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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P. Welch
Administrative Director
The Greenhouse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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